시한잔 —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났나요?
시 한 잔, 차 한 잔처럼 — 잠깐 쉬어 가는 곳이에요
손안의 것
골목 어귀를 지키던 흰 불빛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새어나오던 조그만 온기를 외투 깊숙이 쥐고 걸어왔습니다 밤새 식지 않은 캔 하나를 찬 이슬 맺힌 길목에 내려놓으며 말없이 어깨를 웅크린 당신에게 가만히 건네어 봅니다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황막(荒漠)한 벌판을 희게 덮어 다오. 차디찬 서리의 독배(毒杯)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無慈悲)한 바람 때없이 지나는 잔 칼질 길에 피투성이 낙엽(落葉)이 가득 쌓인 대지(大地)의 젖가슴 포오트랩 빛의 상처(傷處)를.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 다오. 사해(死骸)의 한지(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錦繡)의 옷과 청춘(靑春)의 육체(肉體)를 다 빼앗기고…
뒤축
찬 바닥에 놓인 구두는 한쪽만 비스듬히 닳아 있습니다 새벽 공기가 가만히 와 닿는 주름진 가죽의 틈마다 어제의 바깥이 남아 있고 혼자 짊어졌을 무게를 차마 묻지 못하여 조용히 코를 모아 둡니다
둥근 코
어머니의 닳은 슬리퍼 곁에 노란 운동화가 놓여 있다 어제 묻혀 온 마당 흙을 발등에 조금 얹은 채로 문틈으로 맑고 찬 기운이 들면 작은 신발은 더 바싹 다가선다 서로의 뒤축을 데워 주듯 나란히 엎드린 아침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늦은 마중
모두가 지나간 뒤에야 골목 끝 불이 들어왔습니다 어둠을 더듬어 오던 걸음이 잠시 멈칫할 만큼 환하지도 않은 주황빛이 시린 발등을 가만히 덮습니다 혼자 건너온 그 길은 헛되지 않았다는 듯 말없이 낮은 자리를 데워 줍니다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꽃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 맘.
별
가지 사이로 별이 보인다. 천년만년(千年萬年) 예지(叡智)에 찬 눈. 우주(宇宙)는 영원(永遠)히 멸망(滅亡) 않으리!
같어요
학교에선 같어요 같어요. 있는 집 애도 없는 집 애도, 공불 잘해야 젤이지요. 소학생 소학생. 강에선 같어요 같어요.…
봄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黃昏)이 붉게 물들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한 다리, 바람이 수면(水面)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