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잔.

시한잔 —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났나요?

9월 28일 월요일 · 밤 한 잔

처음 오셨나요?

시 한 잔, 차 한 잔처럼 — 잠깐 쉬어 가는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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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 잔

옛 시

청포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AI 목소리 낭송
빈 자리 하나아직 회원의 시가 올라오지 않았어요. 첫 번째 시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겉잎

서리 덜 깬 마당 한편에 절인 잎들이 차갑게 누워 있습니다 붉은 속을 켜켜이 채워 묵묵히 건네주는 손 두 뺨 위로 번지는 입김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엉깁니다 겨울을 건널 것들이 차곡차곡 어둠 속으로 묻힙니다

  • #가을
  • #가족
2번 읽힘

손안의 것

골목 어귀를 지키던 흰 불빛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새어나오던 조그만 온기를 외투 깊숙이 쥐고 걸어왔습니다 밤새 식지 않은 캔 하나를 찬 이슬 맺힌 길목에 내려놓으며 말없이 어깨를 웅크린 당신에게 가만히 건네어 봅니다

  • #가을
  • #위로
2번 읽힘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황막(荒漠)한 벌판을 희게 덮어 다오. 차디찬 서리의 독배(毒杯)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無慈悲)한 바람 때없이 지나는 잔 칼질 길에 피투성이 낙엽(落葉)이 가득 쌓인 대지(大地)의 젖가슴 포오트랩 빛의 상처(傷處)를.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 다오. 사해(死骸)의 한지(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錦繡)의 옷과 청춘(靑春)의 육체(肉體)를 다 빼앗기고…

뒤축

찬 바닥에 놓인 구두는 한쪽만 비스듬히 닳아 있습니다 새벽 공기가 가만히 와 닿는 주름진 가죽의 틈마다 어제의 바깥이 남아 있고 혼자 짊어졌을 무게를 차마 묻지 못하여 조용히 코를 모아 둡니다

  • #가을
  •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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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코

어머니의 닳은 슬리퍼 곁에 노란 운동화가 놓여 있다 어제 묻혀 온 마당 흙을 발등에 조금 얹은 채로 문틈으로 맑고 찬 기운이 들면 작은 신발은 더 바싹 다가선다 서로의 뒤축을 데워 주듯 나란히 엎드린 아침

  • #가을
  •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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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AI 목소리 낭송

헹굼

기름 묻은 넓적한 접시들이 더운물 아래 잠긴다 미끄러운 등을 문지르면 달그락 소리가 씻기고 여럿이 비워 낸 사발을 차례로 엎어 놓는다 손등에 남은 거품이 저녁 바람에 사위어 갈 때 말간 굽마다 물방울이 맺힌다

  • #가을
  •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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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마중

모두가 지나간 뒤에야 골목 끝 불이 들어왔습니다 어둠을 더듬어 오던 걸음이 잠시 멈칫할 만큼 환하지도 않은 주황빛이 시린 발등을 가만히 덮습니다 혼자 건너온 그 길은 헛되지 않았다는 듯 말없이 낮은 자리를 데워 줍니다

  • #가을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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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꽃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 맘.

더딘 몫

겉봉의 모서리를 만진다 해거름이 마당을 쓸고 가고 서랍 속엔 접힌 종이 하나 먹빛이 제풀에 흐려질 때까지 그저 가만히 두었다 닿지 않아도 절로 깊어지는 자리가 있어 기름불 심지를 낮춘다

  • #가을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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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모서리

바람이 창틀을 툭 치고 간다 잔 위로 짧게 흩어지는 김 외투를 챙기다 말고 식탁 모서리를 만지작거린다 주말 쪽으로 조금 기운 걸음이 발목에서 가만히 풀린다

  •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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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黃昏)이 붉게 물들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한 다리, 바람이 수면(水面)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