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잔 —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났나요?
시 한 잔, 차 한 잔처럼 — 잠깐 쉬어 가는 곳이에요
창을 남쪽으로
창(窓)을 남쪽으로 뚫어라. 끝없이 푸른 저 ─ 이월(二月)의 하늘. 제비 한 마리 떴다 높이…… 창(窓)을 남쪽으로 뚫어라 하늘 한복판 쏟아 나리는 황금(黃金)의 햇발을 담뿍 가슴에 안으련다.…
출발선
구령대 위 쇠나팔이 먼 허공을 향해 찢어지던 소리 무릎에 묻은 흰 가루를 털며 우리는 어디로 그렇게 달렸을까 바통을 쥐지 않은 손을 넣고 서늘한 골목을 혼자 걷는다 돌아보면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귓등만 오래 달아올라 있다
뒤축
찬 바닥에 놓인 구두는 한쪽만 비스듬히 닳아 있습니다 새벽 공기가 가만히 와 닿는 주름진 가죽의 틈마다 어제의 바깥이 남아 있고 혼자 짊어졌을 무게를 차마 묻지 못하여 조용히 코를 모아 둡니다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門)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孤寂)한 잠자리에 홀로 누어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헹굼
기름 묻은 넓적한 접시들이 더운물 아래 잠긴다 미끄러운 등을 문지르면 달그락 소리가 씻기고 여럿이 비워 낸 사발을 차례로 엎어 놓는다 손등에 남은 거품이 저녁 바람에 사위어 갈 때 말간 굽마다 물방울이 맺힌다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늦은 마중
모두가 지나간 뒤에야 골목 끝 불이 들어왔습니다 어둠을 더듬어 오던 걸음이 잠시 멈칫할 만큼 환하지도 않은 주황빛이 시린 발등을 가만히 덮습니다 혼자 건너온 그 길은 헛되지 않았다는 듯 말없이 낮은 자리를 데워 줍니다
실제 1
조그만 시인이여 어찌 내 앞에 와 서는가 내 앞에 와서 무슨 말을 써보려는가 아프리카의 탁 터져 끝없는 벌판에 우거진 숲그늘과 촬촬거리는 시냇물이 그리워 내 눈이 눈물을 흘린다고 마치 계집애의 사랑을 잃고 가슴 짜내어 우는 두 볼 여윈 시인의 얼굴로 내 낯을 그리려는가 네 스스로의 달콤한 설움을 버리고 나의 가슴을 네 가슴에 받아들이어 나의 굵은 말을 네 말을 삼으라 시인이여
쉽게 씨워진 시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삽사리
그날밤 그대의 밤을 지키든 삽사리 괴임즉도 하이 짙은 울 가시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덧문이오 미닫이오 안의 또 촉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눈이 치로 싸힌 고삿길 인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무엇에 후젓허든 맘 못뇌히길래 그리 짖었드라니 어름알로 잔돌사이 뚫로라 죄죄대든 개올 물소리 긔여 들세라 큰봉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오든 이윽달도 선뜻 나려 설세라 이저리 서대든것이러냐 삽사리 그리 굴음즉도 하이 내사 그대ㄹ 새레 그대 것엔들 다흘법도 하리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릇 도사리고 그대 벗으신 곻은 신이마 위하며 자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