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동경

이장희1900–1929

여린 안개 속에 녹아든 쓸쓸하고도 낡은 저녁이 어디선지 물같이 기어와서 회색(灰色)의 꿈노래를 아뢰이며 갈대같이 가냘픈 팔로 끝없이 나의 몸을 둘러 주도다. 야릇도 하여라 나의 가슴 속 깊이도 갈앉아 가늘게 고달픈 숨을 쉬고 있던 핼푸른 옛생각은 다시금 꾸물거리며 느껴 울다. 아, 이러할 때 무덤같이 잠잠한 모래두던 위에 무릎을 껴안고 시름없이 앉은 이 나의 거칠은 머리칼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결에 갈갈이 나부끼어라. 반원(半圓)을 커다랗게 그리는 동(東)녘 하늘 끝에 조그만 샛별이 떠 있어 성자(聖者)같이 늘어선 숲 너머로 언제 보아도 혼자일러라. 선잠에서 눈뜬 샛별은 싸늘한 나의 뺨같이 떨며 은(銀)빛진 미소(微笑)를 보내나니. 외떨어진 샛별이여, 내려봄이 어디런가. 남(藍)빛에 흔들리는 바다런가. 바다이면 아마도 섬이 있고 섬이면은 고운 꽃피는 수국(水國)이리라. 오, 어쩔 수 없는 머나먼 동경(憧憬)이여. 흐르는, 구름에 실려서라도 나는 가련다, 가지 않고 어이하리. 얄밉게도 지금은 수국(水國)의 꽃숲으로 돌아가 버린 그러나 그리운 옛님을 뵈올까 하여 그러면 님이여, 혹(或)시 그대의 문(門)을 두드리건든 젊어서 시들은 나의 혼(魂)을 끝없는 안식(安息)에 멱감게 하소서. 아, 저 두던에 울리도다. 마리아의 은은한 쇠북소리에, 저녁은 갈수록 한숨지어라.

안개 낀 저녁, 샛별 너머 먼 곳을 그리는 마음. 스물아홉에 떠난 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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