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1879–1944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려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아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땅도 이름도 빼앗긴 자리에서, 눈물 속에 비로소 '당신'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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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님의 침묵』, 1926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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