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태평양에서

박인환1926–1956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年月)도 없고 태양은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거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深幽)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砲艦)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서.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크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 태평양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갈매기와 '고독'. 날짜도 잊은 바다 위에서 태양마저 차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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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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