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독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고운 서정시인이 품은 독. 짐승에게 내맡겨지지 않겠다는 결기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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