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버리지 아니하면

한용운1879–1944

나는 잠자리에 누어서 자다가 깨고 깨다가 잘 때에 외로운 등잔불은 각근(恪勤)한 파수군(派守軍)처럼 온밤을 지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일생의 등잔불이 되어서 당신의 백년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여러 가지 글을 볼 때에 내가 요구만 하면 글은 좋은 이야기도 하고 맑은 노래도 부르고 엄숙한 교훈도 줍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복종의 백과전서가 되어서 당신의 요구를 수응(酬應)하겠습니다 나는 거울을 대하여 당신의 키스를 기다리는 입술을 볼 때에 속임 없는 거울은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거울도 찡그립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마음의 거울이 되어서 속임 없이 당신의 고락을 같이 하겠습니다

등잔불처럼, 백과사전처럼, 거울처럼. 나를 버리지 않으면 당신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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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26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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