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어디라도

한용운1879–1944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러줍니다 근심을 잊을까 하고 꽃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 사이를 스쳐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 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부끄러움을 살뜰이도 덮어 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찾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 맞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대야의 물결, 봄바람, 어둔 빛이 되어 곁에 있는 당신.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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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26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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