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꿈이면은?

홍사용1900–1947

사랑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허튼 주정(酒酊) 아니라, 부숴 버리자, 종이로 만든 그까짓 화환(花環) 지껄이지 마라, 정 모르는 지어미야 날더러 안존(安尊)치 못하다고? 귀밑머리 풀으기 전(前) 나는 그래도 순실(純實) 하였었노라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모두 아가 것이라고 내가 어릴 옛날에 어머니께서 어머니 눈이 끔적하실 때, 나의 입은 벙긋벙긋 어렴풋이 잠에 속으며, 그래도 좋아서 모든 세상이 이러한 줄 알고 왔노라. 속이지 마라, 웃는 님이여 속이지 마라, 부디 나를 속이지 마라. 그러할 터면, 차라리 나를 검은 칠관(漆棺)에다 집어 넣고서 뾰족한 은정(銀釘)을, 네 손으로 처박아 다오 내나 너를 만날 대까지는 또 만날 때면은, 순실(純實) 하였었노라 입을 맞추려거든, 나의 눈을 가리지 마라. 무엇이든지 주면은, 거저 받을 터이니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의심(疑心) 케 마라 또 간사(奸詐)에 들게 마라. 그리고, 온갖 소리를 치워 다오 듣기 싫다. 회색창(灰色窓) 뒤에서 철벅거리는 목욕(沐浴) 물 소리 내가 입을 다무랴, 입을 다물어? 속고도, 말 못하는 이 세상이다 억울하고도, 말 못하는 이 세상이다 내가 터 닦아 놓은 꽃밭에 어른어른하는 흰 옷은, 누구? 놀래어 도망하는 시악시 사랑아 오이씨 같은 어여쁜 발아 왜, 남의 화단(花壇)을, 무너뜨리고만 가느뇨 뭉뜯어 내버린 꽃송일 주섬주섬 주워담자 임자가 나서거든 던져 주려고 앞산의 큰 영(嶺)을 처음 넘어서 낯모르는 마을로 찾아나 가자 퇴금색(褪金色)의 옷 입은 여왕의 사자(使者)가 번쩍거리는 길가에, 나를 붙들고 동산의 은빛 달이 동그레 돋거든 여왕궁(女王宮)의 뒷문으로 중맞이 오라면 옳지 좋다, 좀이나 좋으랴. 생전(生前)에 처음 좋은 천진(天眞)의 내다 그러나 그러나, 이 어린 손으로 초연(初戀)의 붉은 문을 두드릴 때에 꿈에나 뜻했으랴, 뜻도 아니한 무지한 문지기의 성난 눈초리 그래도 나는, 거침없이 말하겠노라. 이 꽃의 임자는, 우리 님이시다 그러나 꽃을 받을 어여쁜 님아 어데로 갔노? 어데로 갔노? 한 송이 꽃도 못다 이뻐서 들으나, 그는 무덤에 들었다 님의 무덤에 가자마자 그 꽃마저 죽노나! 그 꽃마저 죽노나! 그 꽃마저 죽자마자 날뛰는 이 가슴도 시들시들 가을 바람 아! 이게 꿈이노? 이게 꿈이노! 꿈이면은, 건넛산 어슴푸레한 흙구덩이를 건너다보고서, 실컷 울었건마는 깨어서 보니, 거짓이고 헛되구나, 사랑의 꿈이야. 실연(失戀)의 산기슭 돌아설 때에 가슴이 미어지는 그 울음은 뼈가 녹도록 아팠건마는 모질어라 매정하여라 깨어서는, 흐르는 눈물 일부러 씻고서 허튼 잠꼬대로 돌리고 말고녀.

사랑에 속고 잃은 젊은이의 격한 독백.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절규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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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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