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오셔요

한용운1879–1944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요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에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 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꽃밭으로, 품으로, 끝내 죽음 속으로라도 오라는 부름. 기다림이 점점 단단한 약속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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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님의 침묵』, 1926 ·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공유저작물입니다. 본문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의 원문을 따랐습니다(띄어쓰기·한자 읽기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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