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 한 편

옛 시 서가

쾌락

한용운1879–1944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큼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주고 북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그림자가 소리 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곤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롱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늘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개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 아무 기쁨도 없는 내게 남은 단 하나의 쾌락은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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